최근 한 유아 영어 교육업체 직원이 배달 노동자를 향해 막말을 한 녹취가 공개돼 인터넷이 뜨거웠다. 해당 녹취 파일에는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으면 배달 일을 하겠냐”는 등의 편견과 차별이 담긴 말이 녹음됐다. 해당 교육업체 직원은 또 “돈 못 버니 그 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했고 “부모에게 그렇게 배웠냐”는 등의 막말도 쏟아냈다.
이를 두고, 배달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내건 라이더유니온 측은 ‘일명 학원강사 배달갑질 사건관련 입장’을 내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배달 노동자들에 대한 편견과 무시를 지적했다. 입장문에는 “이번 사건이 단순히 나쁜 손님에 의해 발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배달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근본적 원인”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라이더유니온 지적대로, 이 사건은 배달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무시와 차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볼 수 있다. 정도의 문제가 있을 뿐 무시와 차별은 여러 곳에서 목격되고 있고 현실에 상존하기 때문이다.
고급 아파트 입주민들은 배달 오토바이의 단지 내 운행을 전면 중지하고 있다.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도록 강제하는가 하면 보안을 이유로 배달 중 헬멧을 의무적으로 벗도록 하고 있다. 비옷을 입고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하게 한 단지가 있다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런 단지들에 대해, 힘없는 ‘을’의 위치에 있는 배달 업체 직원들이 배달 거부를 하거나 배달료를 추가 지급하도록 하는 방안을 채택하고 있지만 이른바 ‘배달 갑질’의 행태를 근절시키는 방안이 될 수는 없다.
사실, 필자는 이번 사건이 논란이 되기 전 ‘플랫폼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아보자’는 취지로 ‘쿠팡이츠’라는 배달 서비스를 1주일 넘게 해 본 적이 있다. 다행히, 6년 넘게 출퇴근으로 이용했던 125cc 스쿠터가 있었고, 오토바이 주행에도 익숙했던 터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또, 배달 노동자들의 요구를 반영해 만들어진 ‘배달 파트너’ 앱을 이용하면 고객과 대면할 일이 없어 이른바 ‘배달 갑질’에 눈물을 쏟을 일도 없었다(배달 평점이라고 고객이 배달 만족도를 평가하는 시스템이 있어 배달 직원에 대해 컴플레인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마음의 짐이었지만).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배달 갑질’ 문화와 함께 부가가치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인식되는 업종 종사자에 대해 차별. 또, 사회적 무시의 원인과 해결 방안을 고민해 보고자 한다. 다만, 필자의 경우 배달 소득이 생계로 직결되지 않는, 적어도 절박하지 않은 상황에서 했던 노동이라는 점에서 ‘생계형 플랫폼 노동자’들이 실제 느끼는 감정과는 다를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자 한다.
돈으로는 다 반영되지 않는 노동의 가치
배달 노동자로 대표되는 ‘3D 종사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무시가 비단 2021년, 오늘 만의 문제는 아니다. 좋은 말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배웠지만, 어느 시대에나 직업의 귀천은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문제는 차별과 편견, 무시와 경멸의 수준이다. 노동의 가치가 단순히 돈의 액수로만 매겨지는 배금주의의 확산 속에서 노동과 직업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배금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판단의 기준은 돈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 판단의 기준이 된 돈은 노동의 가치를 100% 반영하지 않는다. 토마 피케티가 ‘신자본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역사적으로 자본 수익률은 노동 수익률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이런 추세는 미래에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노동의 금전적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
실제, 부모님을 잘 만나 한 달에 100만 원을 받는 임대료와 배달 수백 번을 통해 얻는 100만 원의 임대료는 절대적인 액면가가 같다. 하지만, 그 사회적 가치까지 같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배금주의의 확산은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노동이 사회적 ‘공동선(Common good)’에 금전 외적인 가치는 무시되기 일쑤다. 우리 사회가 배금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이른바 ‘능력주의의 확산’도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정당화하고 있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성취가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기반했다고 전제하고, 능력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최근 그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는 자신의 성공을 사회적 협력의 결과로 인식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샌들 교수는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이 사회적 협력의 대상이 되는 기층의 사람들이 제공하는 노동과 그들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가치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성취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이 만들어내는 가치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사실, 그 능력이라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능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완전히 동일한 출발선상을 현실에서 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 대학입시 격인 SAT 성적은 부모의 지위나 소득에 비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른바 명문대 입학자 가운데 서울, 특히 강남과 서초 등 이른바 교육 특구 비중은 압도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높게 나타난다. 환경의 차이를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배달 갑질’ 문제는 우리 사회 ‘갑질 문화’의 상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갑질 문화의 중심에는 기층의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배금주의와 능력주의에 있다. 결국, 이런 인식을 개선하려는 사회적 노력 없이는 배달 갑질 문제 역시 해결 실마리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인식의 개선에는 교육의 역할이 크다. 우리 사회가 구성원들의 협력과 희생 속에서 발전한다는 것. 또, 자신의 성공과 성취가 온전히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기대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을 심어주는 데, 교육만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없다. 샌들 교수 역시 능력주의 완화를 위해, 자신의 성공에 대한 ‘겸손’을 키워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인종 차별에 저항했던 인물로만 알려진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은 그래서 울림이 크다. 흑백 차별뿐 아니라 약자의 인권을 대변했던 킹 목사는 “청소부가 쓰레기를 치워주지 않으면 병이 창궐하기 때문에 병을 고치는 의사와 청소부의 노동은 동일하게 존엄하다”고 했다. 배달 노동을 담당해주는 사람의 노동 없이 우리는 배달 서비스의 편리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 ps. 영어 교육업체 직원의 갑질에는 ‘대단한 반전’이 숨어 있었다. 녹취에서 자신은 수천만 원을 버는 유명 강사인 것처럼 얘기했지만, 그녀 역시 학원이 운용하는 셔틀 도우미였다는 사실이고, 이번 일로 실직하게 됐다. 우리 사회에는, 지금은 막을 내린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처럼 누군가에게는 갑이고, 누군가에겐 을이고 병인 사람들뿐이다.
최근 한 유아 영어 교육업체 직원이 배달 노동자를 향해 막말을 한 녹취가 공개돼 인터넷이 뜨거웠다. 해당 녹취 파일에는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으면 배달 일을 하겠냐”는 등의 편견과 차별이 담긴 말이 녹음됐다. 해당 교육업체 직원은 또 “돈 못 버니 그 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했고 “부모에게 그렇게 배웠냐”는 등의 막말도 쏟아냈다.
이를 두고, 배달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내건 라이더유니온 측은 ‘일명 학원강사 배달갑질 사건관련 입장’을 내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배달 노동자들에 대한 편견과 무시를 지적했다. 입장문에는 “이번 사건이 단순히 나쁜 손님에 의해 발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배달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근본적 원인”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라이더유니온 지적대로, 이 사건은 배달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무시와 차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볼 수 있다. 정도의 문제가 있을 뿐 무시와 차별은 여러 곳에서 목격되고 있고 현실에 상존하기 때문이다.
고급 아파트 입주민들은 배달 오토바이의 단지 내 운행을 전면 중지하고 있다.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도록 강제하는가 하면 보안을 이유로 배달 중 헬멧을 의무적으로 벗도록 하고 있다. 비옷을 입고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하게 한 단지가 있다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런 단지들에 대해, 힘없는 ‘을’의 위치에 있는 배달 업체 직원들이 배달 거부를 하거나 배달료를 추가 지급하도록 하는 방안을 채택하고 있지만 이른바 ‘배달 갑질’의 행태를 근절시키는 방안이 될 수는 없다.
사실, 필자는 이번 사건이 논란이 되기 전 ‘플랫폼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아보자’는 취지로 ‘쿠팡이츠’라는 배달 서비스를 1주일 넘게 해 본 적이 있다. 다행히, 6년 넘게 출퇴근으로 이용했던 125cc 스쿠터가 있었고, 오토바이 주행에도 익숙했던 터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또, 배달 노동자들의 요구를 반영해 만들어진 ‘배달 파트너’ 앱을 이용하면 고객과 대면할 일이 없어 이른바 ‘배달 갑질’에 눈물을 쏟을 일도 없었다(배달 평점이라고 고객이 배달 만족도를 평가하는 시스템이 있어 배달 직원에 대해 컴플레인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마음의 짐이었지만).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배달 갑질’ 문화와 함께 부가가치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인식되는 업종 종사자에 대해 차별. 또, 사회적 무시의 원인과 해결 방안을 고민해 보고자 한다. 다만, 필자의 경우 배달 소득이 생계로 직결되지 않는, 적어도 절박하지 않은 상황에서 했던 노동이라는 점에서 ‘생계형 플랫폼 노동자’들이 실제 느끼는 감정과는 다를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자 한다.
돈으로는 다 반영되지 않는 노동의 가치
배달 노동자로 대표되는 ‘3D 종사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무시가 비단 2021년, 오늘 만의 문제는 아니다. 좋은 말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배웠지만, 어느 시대에나 직업의 귀천은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문제는 차별과 편견, 무시와 경멸의 수준이다. 노동의 가치가 단순히 돈의 액수로만 매겨지는 배금주의의 확산 속에서 노동과 직업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배금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판단의 기준은 돈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 판단의 기준이 된 돈은 노동의 가치를 100% 반영하지 않는다. 토마 피케티가 ‘신자본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역사적으로 자본 수익률은 노동 수익률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이런 추세는 미래에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노동의 금전적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
실제, 부모님을 잘 만나 한 달에 100만 원을 받는 임대료와 배달 수백 번을 통해 얻는 100만 원의 임대료는 절대적인 액면가가 같다. 하지만, 그 사회적 가치까지 같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배금주의의 확산은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노동이 사회적 ‘공동선(Common good)’에 금전 외적인 가치는 무시되기 일쑤다. 우리 사회가 배금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이른바 ‘능력주의의 확산’도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정당화하고 있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성취가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기반했다고 전제하고, 능력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최근 그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는 자신의 성공을 사회적 협력의 결과로 인식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샌들 교수는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이 사회적 협력의 대상이 되는 기층의 사람들이 제공하는 노동과 그들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가치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성취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이 만들어내는 가치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사실, 그 능력이라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능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완전히 동일한 출발선상을 현실에서 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 대학입시 격인 SAT 성적은 부모의 지위나 소득에 비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른바 명문대 입학자 가운데 서울, 특히 강남과 서초 등 이른바 교육 특구 비중은 압도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높게 나타난다. 환경의 차이를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배달 갑질’ 문제는 우리 사회 ‘갑질 문화’의 상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갑질 문화의 중심에는 기층의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배금주의와 능력주의에 있다. 결국, 이런 인식을 개선하려는 사회적 노력 없이는 배달 갑질 문제 역시 해결 실마리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인식의 개선에는 교육의 역할이 크다. 우리 사회가 구성원들의 협력과 희생 속에서 발전한다는 것. 또, 자신의 성공과 성취가 온전히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기대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을 심어주는 데, 교육만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없다. 샌들 교수 역시 능력주의 완화를 위해, 자신의 성공에 대한 ‘겸손’을 키워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인종 차별에 저항했던 인물로만 알려진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은 그래서 울림이 크다. 흑백 차별뿐 아니라 약자의 인권을 대변했던 킹 목사는 “청소부가 쓰레기를 치워주지 않으면 병이 창궐하기 때문에 병을 고치는 의사와 청소부의 노동은 동일하게 존엄하다”고 했다. 배달 노동을 담당해주는 사람의 노동 없이 우리는 배달 서비스의 편리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 ps. 영어 교육업체 직원의 갑질에는 ‘대단한 반전’이 숨어 있었다. 녹취에서 자신은 수천만 원을 버는 유명 강사인 것처럼 얘기했지만, 그녀 역시 학원이 운용하는 셔틀 도우미였다는 사실이고, 이번 일로 실직하게 됐다. 우리 사회에는, 지금은 막을 내린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처럼 누군가에게는 갑이고, 누군가에겐 을이고 병인 사람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