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범죄라고 하지만 세상에 묻지마 범죄는 없다. 그렇다고 동기 없는 범죄도 없기에 '무동기' 범죄도 없다. 관습적인 전통 범죄자의 범행 동기와 다를 뿐이다. 이런 유형의 범죄일수록 더 깊이 연구하고 자료를 축적하여 잠재적 범죄의 예방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최선의 형사정책은 예방이며, '묻지마'식 범죄의 예방을 위해서는 그 원인으로 알려진 사회구조적 문제의 해결이라는 거시적 접근과 경찰을 비롯한 형사사법제도가 힘을 보태는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세상에 ‘묻지마’ 범죄란 없다. 경찰이 새롭게 정의한 ‘이상 동기’ 범죄가 그나마 무난하다고 할 수 있다. 언론에서 ‘묻지마’ 범죄라고 처음 작명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마치 공식적인, 학술 용어처럼 그렇게 불러왔던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와 범행의 동기가 기존의 전통적인 범죄와는 뚜렷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특정인이 특정인을 대상으로 특정한 동기를 가지고 행해졌던 전통 범죄와는 달리 이 새로운 형태의 범죄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도 없으며, 특정인을 표적으로 하지도 않고,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또는 범행의 특정적이고 뚜렷한 동기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분명한 것은 범행의 동기가 없는 ‘무동기’ 범죄는 아니며, 단지 범행 동기가 전통 범죄와는 다를 뿐이다. 전통 범죄가 대체로 치정, 보복, 이재 등이 동기인 반면에, ‘묻지마’ 범죄는 전문가들이 현실 불만형, 정신 장애형, 그리고 만성 분노형으로 나누고 있는 점을 보아 불만, 분노, 증오, 그리고 정신장애가 범행의 동기요 원인으로 진단하고 있다. 마치 범죄학에서 말하는 범죄의 한 유형으로 ’피해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가 매춘, 도박, 마약과 같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인이거나 피해자가 불특정 다수인인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피해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전통 범죄 피해자와 사뭇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피해자가 없다고 표현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범죄학의 ‘피해자 없는’ 범죄처럼 ‘동기 없는 범죄’라 부를 것인가 아니면 범행 동기가 전통 범죄와 다르다는 점에서 ‘이상 동기’ 범죄라고 불러야 할 것인지 고민의 시간이 시작된다.
또 하나 ‘묻지마’ 범죄의 통념은 폭력의 ‘무작위성’이나 ‘무차별성(Randomness)’일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표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일명 ‘무작위’ ‘무차별’이라고 하지만 사실 엄격하게 최근 일련의 ‘묻지마’ ‘무차별’ 범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가해자와는 일면식도 없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단지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해자가 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는 분명히 ‘무작위’ ‘무차별’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묻지마’ 범죄자들이 범행의 장소를 무작위적으로 선택하여 마치 불특정 다수라는 무작위성을 충족시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지역에서도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을 표적으로 선택한다는 점에서는 그들의 범행이 완전히 ‘무작위’적이고 ‘무차별’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치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에서 완전한 합리성이란 기대하기 어려우며, 대체로 제한된 합리성(Limited Rationality)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처럼 여기서도 ‘묻지마’ 범죄라고 완전한 ‘묻지마’ ‘무작위’ ‘무차별’이라기보다는 제한적, 부분적 ‘무작위’ ‘묻지마’ ‘무차별’이지 않을까.
그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건, 다수 전문가들이 의견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묻지마’ 범죄의 원인 내지는 동기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병의 원인은 정신장애, 현실 불만, 만성 분노라고 진단하고 엉뚱한 처방전을 내놓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현실 불만, 정신 장애, 그리고 만성 분노의 극단적인 폭력적 발현이 ‘묻지마’ 범죄라고 진단해놓고 그 처방은 그냥 나타난 현상, 벌어진 범행에 대한 강력한 형사사법적 대응만 있다는 것이다. 무릇 신체의 질병이건 사회적 질병이건 병의 근원을 치료해야 마땅함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정신 장애가 원인이라면 정신장애의 치료가 필요함에도 강력하게 처벌하겠다는 식이어서, 마치 배가 아픈 아이에게 소화제가 아니라 몽둥이찜질을 하겠다는 식이다. 상대적 박탈과 좌절이라는 사회구조적 문제가 원인이라면 ‘묻지마’ 범죄가 어쩌면 범죄자에 대한 처벌보다는 원인이 되는 사회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진단에 따른 처방과 처방전에 따른 치료를 하지 않고 진단과 처방전, 그리고 치료가 따로따로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문제는 비단 ‘묻지마’ 범죄뿐 아니라 모든 범죄는 예방이 최선임에도 그런 노력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치료도 중요하지만, 예방의학이 강조되는 것과도 같다. 병이 나면 불치병도 있고 난치병도 있으며, 설사 치료할 수 있어도 상당한 시간, 고통, 노력, 그리고 비용을 수반하게 된다. 범죄도 마찬가지다. 일단 발생하면 피해가 생기기 마련이고, 살인의 피해와 같이 때로는 피해가 전혀 회복될 수 없으며, 설사 회복되어도 질병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시간, 노력, 고통, 그리고 비용이 따르며, 더구나 피해당하기 전보다 더 좋아질리 만무한 것이다. 또한 ‘묻지마’ 범죄로 신체적 손상 등의 직접 피해는 당하지 않아도 어쩌면 전 국민이 이런 ‘묻지마’ 범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라는 간접적 피해자가 된다. 범죄의 공포로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곳에서 하고 싶은 시간에 하지 못하는 등 행동유형까지 바꾸어야 하고, 안전을 담보하려고 호신용품을 구비해야 하는 등 추가적인 비용도 강요받게 되어 사람들의 삶의 질이 떨어지고, 국가와 사회,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불신 풍조가 팽배하게 한다. 이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다.
그런데 범죄의 예방은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는 간단할 수도 있다. 학문적으로는 범죄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범죄 발생의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범행의 동기를 가진 잠재적 범죄자가 있어야 하고, 그가 범행할 표적, 즉 잠재적 피해자가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그가 범죄를 실행할 범행의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필요충분조건 중 어느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어떤 범죄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예방된다는 것이다. 먼저, 잠재적 피해자를 보자. 시민 스스로가 범죄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노출되어도 스스로 방어하고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사실 예측할 수 없는 ‘묻지마’ 범죄의 특성상 이는 거의 불가능한 요구이다. 물론 우리가 방어운전을 하여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스스로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사전에 주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기회의 차단도 제한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기회의 차단은 대체로 경찰의 순찰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대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찰이 온 국민을 언제, 어디서나 지킬 수 있도록 순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경찰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거나 언제나 있다는 것, 즉 경찰의 가시성(Visibility)을 통하여 잠재적 범죄자의 범행을 억제하거나 적어도 지연시키거나 다른 장소로 대체시킬 수는 있지만 그 효과는 극히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제 조건은 하나 남았다. 바로 동기의 제거나 해소이다. ‘묻지마’ 범죄의 동기가 전통 범죄와는 다른 이상한 동기, 즉 현실 불만, 정신장애, 만성 분노라면 이는 경찰을 중심으로 한 형사 정책의 대상이 아니지 않을까. 미국에서 60년대 청소년 범죄를 해결하고자 범죄와의 전쟁이 아니라 ‘빈곤과의 전쟁(War on Poverty)“을 선포했던 Johnson 대통령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지금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묻지마’ 범죄라는 사회적 질병이 정신장애와 상대적 박탈과 좌절에 기인한 분노와 증오가 그 원인이라면, 보건복지, 사회정책, 그리고 형사 정책이 어우러진 통합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다음은 최근 신림역과 서현역 사건을 기폭제로 연이은 ‘묻지마’ 범죄 예고에 대한 경찰의 대응을 살펴보자. 시내에 경찰 장갑차와 중무장한 경찰 특공대가 시내에 배치되어 그야말로 시민과 잠재적 범죄자에게 무력 시위를 하고 있다. 당연히 잠재적 범죄자에게는 신속하게 체포하고 확실하고 엄중하게 처벌하겠노라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그들의 범행 동기가 다소나마 억제되거나 연기되어 얼마간 범죄가 예방되거나 적어도 시공간적으로 범죄가 대체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묻지마’ 범죄자 다수는 일종의 ‘확신범’, 즉 자신이 범행하면 당연히 처벌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더구나 역이나 백화점 등 다중이용시설에서의 범행은 더욱 확신적 범행이기에 처벌을 통한 억제도 별 효과가 없을 수 있다. 한편, 시민들은 이 광경에서 한편으로는 안도의 숨을 쉬고, 더 안전함을 느낄 것으로 기대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친 경찰력이나 경찰이 지나치게 많이 눈에 띄는 것에서 오히려 더 불안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기도 하다. 적정한 수준의 경찰 가시성, 즉 경찰이 어디엔가 항상 있다는 인식을 주어 잠재적 범죄자에게는 범행 동기를 억제시키고, 시민들에게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지만, 지나치거나 부족하면 그런 효과도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다른 부정적 영향을 시민에게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경찰 순찰 활동의 적정 수준과 관련된 문제를 살펴보자. 우리는 음식을 조리할 때 맛을 내기 위하여 양념을 사용한다. 양념이 지나치게 부족하면 싱거워서, 반대로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면 짜거나 매워서 음식의 맛이 나지 않는다. 경찰의 순찰 활동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거나(Over Policing), 부족하거나(Under Policing) 모두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마요네즈(Mayonnaise) 이론’ 또는 ‘양념 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 경찰의 순찰 활동은 당연히 범죄를 증가시키고 불안과 공포를 증대시킬 것이며, 이는 곧 경찰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지나친 경찰 순찰 활동은 경찰권의 남용과 오용, 독직 등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는 당연히 경찰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경찰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 심할 경우,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찰 예산을 지원하지 말라(Defund the Police)’라거나 극단적으로는 ‘경찰을 폐지하라(Abolish the Police)’라는 주장까지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지나친 경찰 활동이 어쩌면 Capiophobia라고 하는 경찰에 대한 공포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늦은 밤, 퇴근길, 동네 길목에 줄지어 서 있는 순찰차와 바쁘게 움직이는 경찰관을 본다면 사람들은 오늘 밤은 경찰이 제대로 잘 지키고 있으니 편하게 잠잘 수 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동네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보다고 오히려 문단속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할까?
결론적으로, ‘묻지마’ 범죄라고 하지만 세상에 묻지마 범죄는 없다. 그렇다고 동기 없는 범죄도 없기에 '무동기' 범죄도 없다. 관습적인 전통 범죄자의 범행 동기와 다를 뿐이다. 그 다름을 강조하려고 '이상 동기' 범죄라고도 하지만, 이마저도 이상 동기 범죄를 다 함축하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동기가 이상한 게 아니라 다르다는 점에서 오히려 '특이(Unusual) 동기' 범죄라거나, 세상과 사회에 대한 불만과 증오가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증오(Hate)' 범죄라고 하면 어떨까? 범죄의 예방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묻지마’라고 치부하면 이는 곧 국가와 사회가 더 이상 따지지 않겠다는 무책임의 선언이고 범죄자에게는 죄의식과 죄책감을 줄여주는 횡재이기도 하다. 이런 유형의 범죄일 수록 더 깊이 연구하고 자료를 축적하여 잠재적 범죄의 예방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최선의 형사정책은 예방이며, '묻지마'식 범죄의 예방을 위해서는 그 원인으로 알려진 사회구조적 문제의 해결이라는 거시적 접근과, 정신장애의 문제라면 정신건강이라는 보건의료가 필요하고, 여기에 경찰을 비롯한 형사사법제도가 힘을 보태는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묻지마’ 범죄라고 하지만 세상에 묻지마 범죄는 없다. 그렇다고 동기 없는 범죄도 없기에 '무동기' 범죄도 없다. 관습적인 전통 범죄자의 범행 동기와 다를 뿐이다. 이런 유형의 범죄일수록 더 깊이 연구하고 자료를 축적하여 잠재적 범죄의 예방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최선의 형사정책은 예방이며, '묻지마'식 범죄의 예방을 위해서는 그 원인으로 알려진 사회구조적 문제의 해결이라는 거시적 접근과 경찰을 비롯한 형사사법제도가 힘을 보태는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세상에 ‘묻지마’ 범죄란 없다. 경찰이 새롭게 정의한 ‘이상 동기’ 범죄가 그나마 무난하다고 할 수 있다. 언론에서 ‘묻지마’ 범죄라고 처음 작명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마치 공식적인, 학술 용어처럼 그렇게 불러왔던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와 범행의 동기가 기존의 전통적인 범죄와는 뚜렷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특정인이 특정인을 대상으로 특정한 동기를 가지고 행해졌던 전통 범죄와는 달리 이 새로운 형태의 범죄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도 없으며, 특정인을 표적으로 하지도 않고,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또는 범행의 특정적이고 뚜렷한 동기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분명한 것은 범행의 동기가 없는 ‘무동기’ 범죄는 아니며, 단지 범행 동기가 전통 범죄와는 다를 뿐이다. 전통 범죄가 대체로 치정, 보복, 이재 등이 동기인 반면에, ‘묻지마’ 범죄는 전문가들이 현실 불만형, 정신 장애형, 그리고 만성 분노형으로 나누고 있는 점을 보아 불만, 분노, 증오, 그리고 정신장애가 범행의 동기요 원인으로 진단하고 있다. 마치 범죄학에서 말하는 범죄의 한 유형으로 ’피해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가 매춘, 도박, 마약과 같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인이거나 피해자가 불특정 다수인인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피해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전통 범죄 피해자와 사뭇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피해자가 없다고 표현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범죄학의 ‘피해자 없는’ 범죄처럼 ‘동기 없는 범죄’라 부를 것인가 아니면 범행 동기가 전통 범죄와 다르다는 점에서 ‘이상 동기’ 범죄라고 불러야 할 것인지 고민의 시간이 시작된다.
또 하나 ‘묻지마’ 범죄의 통념은 폭력의 ‘무작위성’이나 ‘무차별성(Randomness)’일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표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일명 ‘무작위’ ‘무차별’이라고 하지만 사실 엄격하게 최근 일련의 ‘묻지마’ ‘무차별’ 범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가해자와는 일면식도 없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단지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해자가 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는 분명히 ‘무작위’ ‘무차별’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묻지마’ 범죄자들이 범행의 장소를 무작위적으로 선택하여 마치 불특정 다수라는 무작위성을 충족시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지역에서도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을 표적으로 선택한다는 점에서는 그들의 범행이 완전히 ‘무작위’적이고 ‘무차별’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치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에서 완전한 합리성이란 기대하기 어려우며, 대체로 제한된 합리성(Limited Rationality)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처럼 여기서도 ‘묻지마’ 범죄라고 완전한 ‘묻지마’ ‘무작위’ ‘무차별’이라기보다는 제한적, 부분적 ‘무작위’ ‘묻지마’ ‘무차별’이지 않을까.
그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건, 다수 전문가들이 의견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묻지마’ 범죄의 원인 내지는 동기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병의 원인은 정신장애, 현실 불만, 만성 분노라고 진단하고 엉뚱한 처방전을 내놓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현실 불만, 정신 장애, 그리고 만성 분노의 극단적인 폭력적 발현이 ‘묻지마’ 범죄라고 진단해놓고 그 처방은 그냥 나타난 현상, 벌어진 범행에 대한 강력한 형사사법적 대응만 있다는 것이다. 무릇 신체의 질병이건 사회적 질병이건 병의 근원을 치료해야 마땅함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정신 장애가 원인이라면 정신장애의 치료가 필요함에도 강력하게 처벌하겠다는 식이어서, 마치 배가 아픈 아이에게 소화제가 아니라 몽둥이찜질을 하겠다는 식이다. 상대적 박탈과 좌절이라는 사회구조적 문제가 원인이라면 ‘묻지마’ 범죄가 어쩌면 범죄자에 대한 처벌보다는 원인이 되는 사회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진단에 따른 처방과 처방전에 따른 치료를 하지 않고 진단과 처방전, 그리고 치료가 따로따로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문제는 비단 ‘묻지마’ 범죄뿐 아니라 모든 범죄는 예방이 최선임에도 그런 노력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치료도 중요하지만, 예방의학이 강조되는 것과도 같다. 병이 나면 불치병도 있고 난치병도 있으며, 설사 치료할 수 있어도 상당한 시간, 고통, 노력, 그리고 비용을 수반하게 된다. 범죄도 마찬가지다. 일단 발생하면 피해가 생기기 마련이고, 살인의 피해와 같이 때로는 피해가 전혀 회복될 수 없으며, 설사 회복되어도 질병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시간, 노력, 고통, 그리고 비용이 따르며, 더구나 피해당하기 전보다 더 좋아질리 만무한 것이다. 또한 ‘묻지마’ 범죄로 신체적 손상 등의 직접 피해는 당하지 않아도 어쩌면 전 국민이 이런 ‘묻지마’ 범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라는 간접적 피해자가 된다. 범죄의 공포로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곳에서 하고 싶은 시간에 하지 못하는 등 행동유형까지 바꾸어야 하고, 안전을 담보하려고 호신용품을 구비해야 하는 등 추가적인 비용도 강요받게 되어 사람들의 삶의 질이 떨어지고, 국가와 사회,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불신 풍조가 팽배하게 한다. 이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다.
그런데 범죄의 예방은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는 간단할 수도 있다. 학문적으로는 범죄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범죄 발생의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범행의 동기를 가진 잠재적 범죄자가 있어야 하고, 그가 범행할 표적, 즉 잠재적 피해자가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그가 범죄를 실행할 범행의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필요충분조건 중 어느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어떤 범죄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예방된다는 것이다. 먼저, 잠재적 피해자를 보자. 시민 스스로가 범죄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노출되어도 스스로 방어하고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사실 예측할 수 없는 ‘묻지마’ 범죄의 특성상 이는 거의 불가능한 요구이다. 물론 우리가 방어운전을 하여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스스로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사전에 주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기회의 차단도 제한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기회의 차단은 대체로 경찰의 순찰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대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찰이 온 국민을 언제, 어디서나 지킬 수 있도록 순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경찰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거나 언제나 있다는 것, 즉 경찰의 가시성(Visibility)을 통하여 잠재적 범죄자의 범행을 억제하거나 적어도 지연시키거나 다른 장소로 대체시킬 수는 있지만 그 효과는 극히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제 조건은 하나 남았다. 바로 동기의 제거나 해소이다. ‘묻지마’ 범죄의 동기가 전통 범죄와는 다른 이상한 동기, 즉 현실 불만, 정신장애, 만성 분노라면 이는 경찰을 중심으로 한 형사 정책의 대상이 아니지 않을까. 미국에서 60년대 청소년 범죄를 해결하고자 범죄와의 전쟁이 아니라 ‘빈곤과의 전쟁(War on Poverty)“을 선포했던 Johnson 대통령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지금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묻지마’ 범죄라는 사회적 질병이 정신장애와 상대적 박탈과 좌절에 기인한 분노와 증오가 그 원인이라면, 보건복지, 사회정책, 그리고 형사 정책이 어우러진 통합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다음은 최근 신림역과 서현역 사건을 기폭제로 연이은 ‘묻지마’ 범죄 예고에 대한 경찰의 대응을 살펴보자. 시내에 경찰 장갑차와 중무장한 경찰 특공대가 시내에 배치되어 그야말로 시민과 잠재적 범죄자에게 무력 시위를 하고 있다. 당연히 잠재적 범죄자에게는 신속하게 체포하고 확실하고 엄중하게 처벌하겠노라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그들의 범행 동기가 다소나마 억제되거나 연기되어 얼마간 범죄가 예방되거나 적어도 시공간적으로 범죄가 대체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묻지마’ 범죄자 다수는 일종의 ‘확신범’, 즉 자신이 범행하면 당연히 처벌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더구나 역이나 백화점 등 다중이용시설에서의 범행은 더욱 확신적 범행이기에 처벌을 통한 억제도 별 효과가 없을 수 있다. 한편, 시민들은 이 광경에서 한편으로는 안도의 숨을 쉬고, 더 안전함을 느낄 것으로 기대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친 경찰력이나 경찰이 지나치게 많이 눈에 띄는 것에서 오히려 더 불안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기도 하다. 적정한 수준의 경찰 가시성, 즉 경찰이 어디엔가 항상 있다는 인식을 주어 잠재적 범죄자에게는 범행 동기를 억제시키고, 시민들에게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지만, 지나치거나 부족하면 그런 효과도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다른 부정적 영향을 시민에게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경찰 순찰 활동의 적정 수준과 관련된 문제를 살펴보자. 우리는 음식을 조리할 때 맛을 내기 위하여 양념을 사용한다. 양념이 지나치게 부족하면 싱거워서, 반대로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면 짜거나 매워서 음식의 맛이 나지 않는다. 경찰의 순찰 활동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거나(Over Policing), 부족하거나(Under Policing) 모두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마요네즈(Mayonnaise) 이론’ 또는 ‘양념 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 경찰의 순찰 활동은 당연히 범죄를 증가시키고 불안과 공포를 증대시킬 것이며, 이는 곧 경찰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지나친 경찰 순찰 활동은 경찰권의 남용과 오용, 독직 등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는 당연히 경찰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경찰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 심할 경우,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찰 예산을 지원하지 말라(Defund the Police)’라거나 극단적으로는 ‘경찰을 폐지하라(Abolish the Police)’라는 주장까지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지나친 경찰 활동이 어쩌면 Capiophobia라고 하는 경찰에 대한 공포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늦은 밤, 퇴근길, 동네 길목에 줄지어 서 있는 순찰차와 바쁘게 움직이는 경찰관을 본다면 사람들은 오늘 밤은 경찰이 제대로 잘 지키고 있으니 편하게 잠잘 수 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동네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보다고 오히려 문단속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할까?
결론적으로, ‘묻지마’ 범죄라고 하지만 세상에 묻지마 범죄는 없다. 그렇다고 동기 없는 범죄도 없기에 '무동기' 범죄도 없다. 관습적인 전통 범죄자의 범행 동기와 다를 뿐이다. 그 다름을 강조하려고 '이상 동기' 범죄라고도 하지만, 이마저도 이상 동기 범죄를 다 함축하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동기가 이상한 게 아니라 다르다는 점에서 오히려 '특이(Unusual) 동기' 범죄라거나, 세상과 사회에 대한 불만과 증오가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증오(Hate)' 범죄라고 하면 어떨까? 범죄의 예방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묻지마’라고 치부하면 이는 곧 국가와 사회가 더 이상 따지지 않겠다는 무책임의 선언이고 범죄자에게는 죄의식과 죄책감을 줄여주는 횡재이기도 하다. 이런 유형의 범죄일 수록 더 깊이 연구하고 자료를 축적하여 잠재적 범죄의 예방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최선의 형사정책은 예방이며, '묻지마'식 범죄의 예방을 위해서는 그 원인으로 알려진 사회구조적 문제의 해결이라는 거시적 접근과, 정신장애의 문제라면 정신건강이라는 보건의료가 필요하고, 여기에 경찰을 비롯한 형사사법제도가 힘을 보태는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