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을 탐지할 정보가 없는 사회에는 자유가 없다”
- ‘20세기 언론계의 교황’ 윌터 리프먼, 『자유와 뉴스(Liberty and the News)』 中
우리 사회의 자유지수는 높지 않다. 리프먼이 말했듯이,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는 주장과 무책임한 의견만이 난무하는 사회는 소란한 지옥과 다름없으며, 그런 곳에는 행복 추구의 조건인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리프먼은 무려 1세기 전 “엄밀한 의미에서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는 저널리즘의 위기”라고 강조했다. 저널리즘의 위기라는 측면에서는 리프먼의 당시 고민과 불만에 비해 오늘날의 현실도 심각함이 결코 못지 않아 보인다.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저널리즘과 자유민주주의의 침식은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21세기 정보전쟁의 ‘첫 희생자’는 ‘진실’을 넘어 ‘민주주의’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번지고 있다. 탈진실 시대는 언론에 대한 불신과 나란히 진행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해마다 구독률과 시청률의 가파른 하락세가 이를 증명한다. 이것은 근대화 시기에 사회의 믿음직한 기관(institution)으로 전범(典範, canon)의 역할을 했던 언론의 위상 추락을 의미한다. 이제는 신문과 방송에서 봤다고 하는 게 신용을 담보하지 못한다. 정치권이 ‘의사사건’(pseudo-event)을 만들어 시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고, 프레임을 짜서 반대파를 공격하고, 이에 맞장구를 치는 매체가 즐비한 네트워크 사회의 정보 생리를 시민들은 알 만큼 안다. 언론과 정치는 늘 ‘기생(parasitic) 관계’였고, 지금 정치와 언론의 동반 추락이 진행 중이다.
사회나 개인이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평상심을 잃는다. 지금 세계 모든 국가에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무엇보다 세계화 이후 직면한 경제침체이다. 자국 우선정책, 보호무역, 이민 반대 등 각국 정책에는 1세기 전 세계 대공황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나쁜 역사가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조바심에서 편협하고 증오에 찬 정책이 세를 얻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좌우 포퓰리즘으로 이어지는 확증 편향과 탈진실의 분위기가 팽배한 속에서도 전체 생활영역 가운데 공론장만큼은 이성과 소통으로 지켜야 한다는 호소가 아직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론장이 탈진실의 분위기를 떨치고 건전한 사회담론을 형성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에 필수 불가결한 저널리즘의 절멸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시민들은 스스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자유는 거짓을 탐지할 정보가 있는 사회에서 나온다
고함만 오가는 생지옥을 피하려면 시민들이 스스로 공론장을 지키는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 이제는 뉴스와 정보의 소비자들이 정화작업에 직접 참여할 때가 됐다. 지금 수용자들은 디지털 디바이스의 보급이 늘어나면서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뉴스와 정보에 쉽게 접할 수 있다. 따라서 본인이 가짜뉴스에 속지 않을 능력을 스스로 길러가야 한다. 물론 복잡하고 전문적인 사실 검증에 대해서는 신뢰 있는 매체들이 진행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자발적인 노력을 해야 자신에 도움이 되는 미디어 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휘발성이 강한 페이크뉴스를 많은 시민들이 가려내고 있다. 사회 전체가 직,간접으로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발전이 필요하고 방법과 영역도 더 확대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신문을 이용한 학습 증대, 미디어 디바이스에 관한 지식과 이용, 가짜뉴스 식별법 등을 중심으로 전개돼 왔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맞아 이 같은 리터러시 교육과 학습이 심층적으로 차원 높게 방향을 전환해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미디어 전반에 관한 이해를 깊게 할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뉴스와 정보의 생산, 유통, 소비 모든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제대로 된 미디어 소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기능, 저널리즘과 민주주의, 여론과 공론장의 상호관계도 필수 대상이다. 그렇게 되면 잡아주는 물고기를 손에 쥐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고 양식을 하는 방법 자체를 배우게 된다. 지금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다양한 과정에서 교육을 하고 있지만 더 심도 있는 교육이 필요하고 다양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예외일 수 없다. 재교육 등을 통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전반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을 권고하고 싶다.
제대로 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사람들은 유튜브와 지상파 방송이 어떻게 다르고, 어떤 문제를 다루는데 사실 보도와 탐사 보도 중 어느 쪽이 적합한지, 기자가 만든 콘텐츠와 PD들이 만든 콘텐츠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등등을 생각할 것이다. 시사프로 진행자가 적격인지를 따져볼 것이다. 칼럼을 읽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낼지 모른다. 댓글의 위험성과 ‘좋아요’의 함정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미디어 섭취의 균형을 위해 영상물과 함께 읽을거리도 필요하다고 깨달을 수도 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시민들이 살아가면서 민주주의적 태도를 위해 갖추어야 할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를 기른다는 점이다. 황치성 전 언론연구재단 책임연구위원은 지난해 발간한 『미디어 리터러시와 비판적 사고』에서 다른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적, 정치적 상황으로 지금까지 이 같은 교육이 결여돼 왔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이 미치게 되면 좌든 우든 극단적인 사고에 몸을 던지는 사례들은 줄어들 수 있다.
다시 리프먼으로 돌아가 조언을 구해보자. 그는 자유로운 사회를 지키는 명분으로 시민들이 지닌 “알고 싶은 욕구, 속거나 조롱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감정이 가장 강력한 모티브가 된다”고 역설했다. 보통 사람들은 생활 속에 몰입돼 이런 것을 잊고 지낸다. 그러다 피부에 와 닿는 사안이 터져 자존심에 불이 붙으면 인내하지 않는다. 별 생각 없이 여론조작과 공작에 편승하다가 자칫 자기가 바보가 된다는 경각심이 발동되면 공론장을 어지럽게 하는 짓은 자제할 것이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편승해 가짜뉴스를 만들고, 악성 댓글을 달고,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전파하는 행위는 ‘비판적 사고’를 않고 정보의 홍수 속에 스스로 몸을 던져 허우적거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몫이라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거짓을 탐지할 정보가 없는 사회에는 자유가 없다”
- ‘20세기 언론계의 교황’ 윌터 리프먼, 『자유와 뉴스(Liberty and the News)』 中
우리 사회의 자유지수는 높지 않다. 리프먼이 말했듯이,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는 주장과 무책임한 의견만이 난무하는 사회는 소란한 지옥과 다름없으며, 그런 곳에는 행복 추구의 조건인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리프먼은 무려 1세기 전 “엄밀한 의미에서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는 저널리즘의 위기”라고 강조했다. 저널리즘의 위기라는 측면에서는 리프먼의 당시 고민과 불만에 비해 오늘날의 현실도 심각함이 결코 못지 않아 보인다.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저널리즘과 자유민주주의의 침식은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21세기 정보전쟁의 ‘첫 희생자’는 ‘진실’을 넘어 ‘민주주의’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번지고 있다. 탈진실 시대는 언론에 대한 불신과 나란히 진행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해마다 구독률과 시청률의 가파른 하락세가 이를 증명한다. 이것은 근대화 시기에 사회의 믿음직한 기관(institution)으로 전범(典範, canon)의 역할을 했던 언론의 위상 추락을 의미한다. 이제는 신문과 방송에서 봤다고 하는 게 신용을 담보하지 못한다. 정치권이 ‘의사사건’(pseudo-event)을 만들어 시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고, 프레임을 짜서 반대파를 공격하고, 이에 맞장구를 치는 매체가 즐비한 네트워크 사회의 정보 생리를 시민들은 알 만큼 안다. 언론과 정치는 늘 ‘기생(parasitic) 관계’였고, 지금 정치와 언론의 동반 추락이 진행 중이다.
사회나 개인이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평상심을 잃는다. 지금 세계 모든 국가에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무엇보다 세계화 이후 직면한 경제침체이다. 자국 우선정책, 보호무역, 이민 반대 등 각국 정책에는 1세기 전 세계 대공황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나쁜 역사가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조바심에서 편협하고 증오에 찬 정책이 세를 얻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좌우 포퓰리즘으로 이어지는 확증 편향과 탈진실의 분위기가 팽배한 속에서도 전체 생활영역 가운데 공론장만큼은 이성과 소통으로 지켜야 한다는 호소가 아직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론장이 탈진실의 분위기를 떨치고 건전한 사회담론을 형성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에 필수 불가결한 저널리즘의 절멸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시민들은 스스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자유는 거짓을 탐지할 정보가 있는 사회에서 나온다
고함만 오가는 생지옥을 피하려면 시민들이 스스로 공론장을 지키는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 이제는 뉴스와 정보의 소비자들이 정화작업에 직접 참여할 때가 됐다. 지금 수용자들은 디지털 디바이스의 보급이 늘어나면서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뉴스와 정보에 쉽게 접할 수 있다. 따라서 본인이 가짜뉴스에 속지 않을 능력을 스스로 길러가야 한다. 물론 복잡하고 전문적인 사실 검증에 대해서는 신뢰 있는 매체들이 진행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자발적인 노력을 해야 자신에 도움이 되는 미디어 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휘발성이 강한 페이크뉴스를 많은 시민들이 가려내고 있다. 사회 전체가 직,간접으로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발전이 필요하고 방법과 영역도 더 확대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신문을 이용한 학습 증대, 미디어 디바이스에 관한 지식과 이용, 가짜뉴스 식별법 등을 중심으로 전개돼 왔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맞아 이 같은 리터러시 교육과 학습이 심층적으로 차원 높게 방향을 전환해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미디어 전반에 관한 이해를 깊게 할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뉴스와 정보의 생산, 유통, 소비 모든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제대로 된 미디어 소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기능, 저널리즘과 민주주의, 여론과 공론장의 상호관계도 필수 대상이다. 그렇게 되면 잡아주는 물고기를 손에 쥐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고 양식을 하는 방법 자체를 배우게 된다. 지금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다양한 과정에서 교육을 하고 있지만 더 심도 있는 교육이 필요하고 다양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예외일 수 없다. 재교육 등을 통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전반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을 권고하고 싶다.
제대로 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사람들은 유튜브와 지상파 방송이 어떻게 다르고, 어떤 문제를 다루는데 사실 보도와 탐사 보도 중 어느 쪽이 적합한지, 기자가 만든 콘텐츠와 PD들이 만든 콘텐츠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등등을 생각할 것이다. 시사프로 진행자가 적격인지를 따져볼 것이다. 칼럼을 읽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낼지 모른다. 댓글의 위험성과 ‘좋아요’의 함정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미디어 섭취의 균형을 위해 영상물과 함께 읽을거리도 필요하다고 깨달을 수도 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시민들이 살아가면서 민주주의적 태도를 위해 갖추어야 할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를 기른다는 점이다. 황치성 전 언론연구재단 책임연구위원은 지난해 발간한 『미디어 리터러시와 비판적 사고』에서 다른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적, 정치적 상황으로 지금까지 이 같은 교육이 결여돼 왔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이 미치게 되면 좌든 우든 극단적인 사고에 몸을 던지는 사례들은 줄어들 수 있다.
다시 리프먼으로 돌아가 조언을 구해보자. 그는 자유로운 사회를 지키는 명분으로 시민들이 지닌 “알고 싶은 욕구, 속거나 조롱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감정이 가장 강력한 모티브가 된다”고 역설했다. 보통 사람들은 생활 속에 몰입돼 이런 것을 잊고 지낸다. 그러다 피부에 와 닿는 사안이 터져 자존심에 불이 붙으면 인내하지 않는다. 별 생각 없이 여론조작과 공작에 편승하다가 자칫 자기가 바보가 된다는 경각심이 발동되면 공론장을 어지럽게 하는 짓은 자제할 것이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편승해 가짜뉴스를 만들고, 악성 댓글을 달고,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전파하는 행위는 ‘비판적 사고’를 않고 정보의 홍수 속에 스스로 몸을 던져 허우적거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몫이라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