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헌법 제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의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권력, 자유, 평등 등 여러 관점에서 차이를 보이는 이념인데
오랜 세월 갈등을 벌이다가 결국 자유민주주의라는 화합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부의 분배를 둘러싸고 다시 갈등상태에 있다.
우리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하여 ‘자유민주적’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자유민주적은 아마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에 대적한 개념으로 사용된 것 같은데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성립된 과정, 특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갈등을 벌이면서 화합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자유는 서구에서 태어났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당신네 작은 섬에서 태어났지요.” 어느 러시아 학자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확언했다. 그의 말대로 자유주의는 영국에서 가장 먼저 꽃피웠다. 자유주의는 국가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 그중에서도 특히 자유의 영역이 있다는 생각에 바탕을 둔 이념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모든 권력, 특히 국가권력의 제한을 대원칙으로 한다. 인간은 가장 소중한 것, 바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를 필요로 한다. 생명과 자유 다음으로 인간에게 소중한 자연권은 소유권이다. 로크는 특히 소유권을 강조했는데, 사람들이 국가를 이루어 그 통치에 굴복하는 목적은 자신의 소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소유가 왜 그처럼 중요할까? 그것은 재산이야말로 개인의 독립과 안전을 확보해주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 자유주의는 구질서의 신분적, 사회적, 정치적 억압을 깨고 ‘재능 있는 자에게 기회를’ 약속해준 해방의 이데올로기였다. 자유주의자들이 원한 세상은, 모든 특권이 철폐되고 모든 장애가 제거되어 개인이 능력과 노력만으로 사다리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 사회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사람들이 동등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간주하고, 사회의 규칙이 공정하게 적용되기를 희망한다는 의미에서 법 앞의 평등을 지지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똑같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재능과 일에 대한 의지 등에서 차이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실력주의로 나아가고,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와 충돌하게 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존재가 무대에 등장한 근대 이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 민주주의는 고대 아테네 민주정에 그 원형이 있다. 물론 다 알다시피 아테네 민주정은 오늘날의 민주정과는 달랐다.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최악의 제도지만 그것보다 나은 것도 없다’라는 재담을 남겼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평등한 정치적 권리다. 즉 성년에 도달한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한 표씩 행사하는 정치적 권리를 갖는 것, 그리하여 국가의 정책 결정에 모든 사람이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대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 이후 정치 사상가들의 압도적 다수는 민주정치의 무질서와 도덕적 타락을 우려했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도 이탈리아의 정치이론가 루지에로는 민주주의의 해악은 수의 승리가 아니라 ‘저질적인 것의 승리’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1830년대에 미국의 신생 민주주의를 주의 깊게 관찰한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사상가인 토크빌은 비록 조잡한 시작이지만 학습을 통해 민주주의는 발전할 것이라고 조심스레 낙관했다.
민주주의가 처음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건은 프랑스대혁명이었는데, 민주주의가 폭도들에 의한 통치를 의미할 수 있다는 플라톤 이래의 불안이 현실로 드러났다. 프랑스혁명이 보여준 과격함 때문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19세기를 통해 확실히 다른 길을 걸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차이가 무엇인지 알아야 둘 사이의 갈등의 원인이 명백해진다. 두 이데올로기의 차이점은 우선 권력에 대한 시각에서 드러난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권력 자체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건 무조건 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민주주의는 권력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권력이 다수에게 있는지 혹은 소수에게 있는지에 관심을 집중한다. 두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차이점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시각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평등이 최고의 가치다. 문제는 자유와 평등이 종종 현실에서 상충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참정권에 대한 시각에서 두 이데올로기의 차이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정치적 평등을 담보하지만 자유주의에서 선거권은 그 권리를 행사할만한 ‘자격’을 입증한 사람들에게 주는 포상이었으며, 자격에서는 특히 경제적, 정신적 자립이 중요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에 이르면 영국과 같은 정치 선진국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화합을 이루어 자유민주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그 이행은 긴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결국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의 자연스러운 발달 결과로 수용하게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수용하게 된 근거는 사회적, 지적 발전 덕분에 ‘자격’을 입증한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판단이었다. 기억할 점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권력을 견제하는 개인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사실인데, 우리사회에서 이 점이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 않다.
오늘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특히 부의 분배에 대한 시각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일부 학자들은 민주주의가 평등한 정치적 권리에서 멈추지 않으며 그 실질적 핵심은 경제적 쟁투라고 생각한다. 결국 부의 분배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저변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수가 더 많은 게 현실인데, 민주주의에서는 다수의 결정이 최고 권력을 갖게 마련이다. 평균보다 적은 소득을 얻는 사람들은 평균보다 많은 수입을 얻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항상 분배의 문제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민주정에 대해 비판적이던 플라톤도 민주정에서는 부자와 빈자 간의 갈등이 격렬해질 것이며 그런 상황이 결국 민주주의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자유주의는 정치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에는 탁견을 보였지만, 부의 분배 문제에서는 소극적이었다. 아담 스미스 식의 사회조화론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반면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에서는 부의 분배가 중요하며, 특히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 결탁한 사회민주주의에서는 부의 재분배가 핵심으로 작용한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이후 줄곧 사회민주적 성향을 강하게 띤 정책을 추진해왔다. 특히 과세와 부동산정책에서 소수 부유층과 저소득층을 대립시키는 정책을 사용하여 갈등을 심화시키면서 그것을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진정 나라의 미래를 우려한다면 헌법이 명시한 대로 자유민주적 질서에 입각하여 대립이 아니라 화합을 추진해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 헌법 제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의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권력, 자유, 평등 등 여러 관점에서 차이를 보이는 이념인데
오랜 세월 갈등을 벌이다가 결국 자유민주주의라는 화합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부의 분배를 둘러싸고 다시 갈등상태에 있다.
우리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하여 ‘자유민주적’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자유민주적은 아마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에 대적한 개념으로 사용된 것 같은데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성립된 과정, 특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갈등을 벌이면서 화합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자유는 서구에서 태어났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당신네 작은 섬에서 태어났지요.” 어느 러시아 학자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확언했다. 그의 말대로 자유주의는 영국에서 가장 먼저 꽃피웠다. 자유주의는 국가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 그중에서도 특히 자유의 영역이 있다는 생각에 바탕을 둔 이념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모든 권력, 특히 국가권력의 제한을 대원칙으로 한다. 인간은 가장 소중한 것, 바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를 필요로 한다. 생명과 자유 다음으로 인간에게 소중한 자연권은 소유권이다. 로크는 특히 소유권을 강조했는데, 사람들이 국가를 이루어 그 통치에 굴복하는 목적은 자신의 소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소유가 왜 그처럼 중요할까? 그것은 재산이야말로 개인의 독립과 안전을 확보해주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 자유주의는 구질서의 신분적, 사회적, 정치적 억압을 깨고 ‘재능 있는 자에게 기회를’ 약속해준 해방의 이데올로기였다. 자유주의자들이 원한 세상은, 모든 특권이 철폐되고 모든 장애가 제거되어 개인이 능력과 노력만으로 사다리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 사회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사람들이 동등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간주하고, 사회의 규칙이 공정하게 적용되기를 희망한다는 의미에서 법 앞의 평등을 지지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똑같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재능과 일에 대한 의지 등에서 차이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실력주의로 나아가고,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와 충돌하게 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존재가 무대에 등장한 근대 이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 민주주의는 고대 아테네 민주정에 그 원형이 있다. 물론 다 알다시피 아테네 민주정은 오늘날의 민주정과는 달랐다.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최악의 제도지만 그것보다 나은 것도 없다’라는 재담을 남겼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평등한 정치적 권리다. 즉 성년에 도달한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한 표씩 행사하는 정치적 권리를 갖는 것, 그리하여 국가의 정책 결정에 모든 사람이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대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 이후 정치 사상가들의 압도적 다수는 민주정치의 무질서와 도덕적 타락을 우려했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도 이탈리아의 정치이론가 루지에로는 민주주의의 해악은 수의 승리가 아니라 ‘저질적인 것의 승리’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1830년대에 미국의 신생 민주주의를 주의 깊게 관찰한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사상가인 토크빌은 비록 조잡한 시작이지만 학습을 통해 민주주의는 발전할 것이라고 조심스레 낙관했다.
민주주의가 처음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건은 프랑스대혁명이었는데, 민주주의가 폭도들에 의한 통치를 의미할 수 있다는 플라톤 이래의 불안이 현실로 드러났다. 프랑스혁명이 보여준 과격함 때문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19세기를 통해 확실히 다른 길을 걸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차이가 무엇인지 알아야 둘 사이의 갈등의 원인이 명백해진다. 두 이데올로기의 차이점은 우선 권력에 대한 시각에서 드러난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권력 자체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건 무조건 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민주주의는 권력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권력이 다수에게 있는지 혹은 소수에게 있는지에 관심을 집중한다. 두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차이점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시각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평등이 최고의 가치다. 문제는 자유와 평등이 종종 현실에서 상충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참정권에 대한 시각에서 두 이데올로기의 차이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정치적 평등을 담보하지만 자유주의에서 선거권은 그 권리를 행사할만한 ‘자격’을 입증한 사람들에게 주는 포상이었으며, 자격에서는 특히 경제적, 정신적 자립이 중요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에 이르면 영국과 같은 정치 선진국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화합을 이루어 자유민주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그 이행은 긴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결국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의 자연스러운 발달 결과로 수용하게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수용하게 된 근거는 사회적, 지적 발전 덕분에 ‘자격’을 입증한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판단이었다. 기억할 점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권력을 견제하는 개인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사실인데, 우리사회에서 이 점이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 않다.
오늘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특히 부의 분배에 대한 시각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일부 학자들은 민주주의가 평등한 정치적 권리에서 멈추지 않으며 그 실질적 핵심은 경제적 쟁투라고 생각한다. 결국 부의 분배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저변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수가 더 많은 게 현실인데, 민주주의에서는 다수의 결정이 최고 권력을 갖게 마련이다. 평균보다 적은 소득을 얻는 사람들은 평균보다 많은 수입을 얻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항상 분배의 문제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민주정에 대해 비판적이던 플라톤도 민주정에서는 부자와 빈자 간의 갈등이 격렬해질 것이며 그런 상황이 결국 민주주의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자유주의는 정치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에는 탁견을 보였지만, 부의 분배 문제에서는 소극적이었다. 아담 스미스 식의 사회조화론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반면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에서는 부의 분배가 중요하며, 특히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 결탁한 사회민주주의에서는 부의 재분배가 핵심으로 작용한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이후 줄곧 사회민주적 성향을 강하게 띤 정책을 추진해왔다. 특히 과세와 부동산정책에서 소수 부유층과 저소득층을 대립시키는 정책을 사용하여 갈등을 심화시키면서 그것을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진정 나라의 미래를 우려한다면 헌법이 명시한 대로 자유민주적 질서에 입각하여 대립이 아니라 화합을 추진해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