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이은 5공화국의 2인자이자, 야당 후보 분열로 개헌 후 첫 직선제 대통령으로 당선된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보통사람' 노태우 전 대통령이 향년 89세에 지난 26일 숙환으로 별세했어. 오늘은 그의 삶을 한번 되돌아볼까 해.
1. 5공화국의 2인자가 되다
1932년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의 면서기였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남으로 태어난 노 전 대통령은 경북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부에 몸담았어. 육사 11기 동기생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결성된 신군부의 '하나회' 세력의 핵심으로 군사쿠데타를 주도했어. 이후 신군부의 2인자로 부상했고, 수도경비사령관, 보안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했지.
정무2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노 전 대통령은 초대 체육부 장관과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민정당 대표를 지냈어. 5공화국 말기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이을 후계자가 되어 마침내 1987년 6월에 치러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어.
2. "나 이 사람 보통 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대선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은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와 정당활동,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약속했어. 결국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지.
민심을 더 확실히 얻기 위해 군사정권의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했어. 특히,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 전략이 꽤 잘 먹혔어. 겉으로 봐도 위압적이고 군화가 더 잘 어울려 보이는 군사정권의 이미지에 비해 노 전 대통령은 군인과는 멀어 보이는 유한 인상이 대중들에게 꽤 어필되었어. 그러나 '3김'이라 불리는 당시 유력 야당 정치인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 등이 모두 출마하며 위기에 빠지는 듯했으나, 3김의 단일화가 실패한 기회를 잘 활용해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어.
3. 대통령의 시간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8년 4.26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정국이 형성되면서 취임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수세에 몰렸어. 야당의 3개 당은 5공특위와 광주특위를 꾸려 '5공청산'을 밀어붙였고, 5공 청문회가 정국을 뜨겁게 달궜어. 이를 탈출하기 위해 '3당 합당'이라는 카드를 선보였지. 김영삼 총재와 김종필 총재를 규합해 216석의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집권 당시를 둘러싸고 많은 이들이 공과 과를 논하지만, '북방정책'만큼은 모두가 높이 평가하고 있어.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뒤, 7.7 선언을 통해 새로운 외교정책비전을 제시했지. 이후 동유럽국가, 소련, 중국, 몽골, 베트남 등과 수교를 맺어 우리나라의 외교 스펙트럼을 넓혔다고 해. 또, 남북관계에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 1991년 12월 남북 총리가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했고, 1992년 1월에는 남북 대화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이끌어냈어.'
경제 발전에도 상당히 이바지했어. 집권 5년간 당시 세계 경제성장률보다 5% 높은 평균 8.5%의 성장을 지속했어. 80년대 이후 진행된 경제 개방화로 금융시장 개방을 제외하고는 선진국 수준에 근접하게 되었어. 그리고 토지공개념 3법이나 재벌에 대한 법적 규제장치가 바로 이 시기에 도입되었지. 억눌려있던 노동운동이 거세지며 최저임금제가 실시되기도 했어. 분당과 일산 등 5개 신도시 건설을 통해 노태우 정부의 선거공약이기도 했던 주택 200만호 공급을 달성하면서 경제 호황에 의한 집값 폭등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대. 영화로도 유명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우리나라의 치안을 안정시키는 기틀을 다졌어.
4. 퇴임 후 수감되다
1993년 2월 25일, 5년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노 전 대통령은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갔어. 하지만, '문민정부'를 표방하며 후임으로 당선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대적인 '5.6공 청산 작업'으로 비자금 은닉과 12.12쿠데타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지게 되었어.
4,100억원의 비자금 은닉이 밝혀지진 노 전 대통령은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었어. 여기에 12.12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에 대한 진상규명 목소리가 커지자, "광주사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가 "내 발언을 용서해달라"고 사과했어. 결국, 5.18 특별법이 제정되고, 검찰은 노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신군부의 핵심 인사 11명을 군형법상 반란수괴죄로 구속 기소했어. 이후 재판을 거쳐 노 전 대통령은 17년 형이 확정되었고, 2,628억 9,600만원의 추징금이 부과되었어. 2년여간의 수감생활 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지. 이후 오랫동안 추징금 미납 논란에 시달리다가 지난 2013년 9월에 완납했어.
5. ‘보통사람’의 마지막
사면 후 칩거를 이어갔던 노 전 대통령은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왔어. 최근 병세가 악화하여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삶이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어. 유족이 공개한 그의 유언을 요약하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남겼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조문했어. 정부는 많은 의견충돌 끝에 노 전 대통령의 장례를 5일간의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어. 서울광장에 합동분향소가 마련되었지. 30일에 예정된 영결식이 진행된 후에는, 유족들이 희망한 경기 파주시 통일동산 주변으로 장지가 확정될 예정이야. 자유로 건설, 헤이리 예술마을 조성, 평화시 건설구상 등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이 많은 곳인만큼 고인 또한 남북 평화통일의 의지를 담았던 파주 통일동산을 장지로 희망해왔어.
12.12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이은 5공화국의 2인자이자, 야당 후보 분열로 개헌 후 첫 직선제 대통령으로 당선된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보통사람' 노태우 전 대통령이 향년 89세에 지난 26일 숙환으로 별세했어. 오늘은 그의 삶을 한번 되돌아볼까 해.
1. 5공화국의 2인자가 되다
1932년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의 면서기였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남으로 태어난 노 전 대통령은 경북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부에 몸담았어. 육사 11기 동기생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결성된 신군부의 '하나회' 세력의 핵심으로 군사쿠데타를 주도했어. 이후 신군부의 2인자로 부상했고, 수도경비사령관, 보안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했지.
정무2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노 전 대통령은 초대 체육부 장관과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민정당 대표를 지냈어. 5공화국 말기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이을 후계자가 되어 마침내 1987년 6월에 치러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어.
2. "나 이 사람 보통 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대선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은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와 정당활동,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약속했어. 결국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지.
민심을 더 확실히 얻기 위해 군사정권의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했어. 특히,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 전략이 꽤 잘 먹혔어. 겉으로 봐도 위압적이고 군화가 더 잘 어울려 보이는 군사정권의 이미지에 비해 노 전 대통령은 군인과는 멀어 보이는 유한 인상이 대중들에게 꽤 어필되었어. 그러나 '3김'이라 불리는 당시 유력 야당 정치인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 등이 모두 출마하며 위기에 빠지는 듯했으나, 3김의 단일화가 실패한 기회를 잘 활용해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어.
3. 대통령의 시간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8년 4.26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정국이 형성되면서 취임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수세에 몰렸어. 야당의 3개 당은 5공특위와 광주특위를 꾸려 '5공청산'을 밀어붙였고, 5공 청문회가 정국을 뜨겁게 달궜어. 이를 탈출하기 위해 '3당 합당'이라는 카드를 선보였지. 김영삼 총재와 김종필 총재를 규합해 216석의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집권 당시를 둘러싸고 많은 이들이 공과 과를 논하지만, '북방정책'만큼은 모두가 높이 평가하고 있어.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뒤, 7.7 선언을 통해 새로운 외교정책비전을 제시했지. 이후 동유럽국가, 소련, 중국, 몽골, 베트남 등과 수교를 맺어 우리나라의 외교 스펙트럼을 넓혔다고 해. 또, 남북관계에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 1991년 12월 남북 총리가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했고, 1992년 1월에는 남북 대화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이끌어냈어.'
경제 발전에도 상당히 이바지했어. 집권 5년간 당시 세계 경제성장률보다 5% 높은 평균 8.5%의 성장을 지속했어. 80년대 이후 진행된 경제 개방화로 금융시장 개방을 제외하고는 선진국 수준에 근접하게 되었어. 그리고 토지공개념 3법이나 재벌에 대한 법적 규제장치가 바로 이 시기에 도입되었지. 억눌려있던 노동운동이 거세지며 최저임금제가 실시되기도 했어. 분당과 일산 등 5개 신도시 건설을 통해 노태우 정부의 선거공약이기도 했던 주택 200만호 공급을 달성하면서 경제 호황에 의한 집값 폭등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대. 영화로도 유명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우리나라의 치안을 안정시키는 기틀을 다졌어.
4. 퇴임 후 수감되다
1993년 2월 25일, 5년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노 전 대통령은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갔어. 하지만, '문민정부'를 표방하며 후임으로 당선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대적인 '5.6공 청산 작업'으로 비자금 은닉과 12.12쿠데타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지게 되었어.
4,100억원의 비자금 은닉이 밝혀지진 노 전 대통령은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었어. 여기에 12.12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에 대한 진상규명 목소리가 커지자, "광주사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가 "내 발언을 용서해달라"고 사과했어. 결국, 5.18 특별법이 제정되고, 검찰은 노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신군부의 핵심 인사 11명을 군형법상 반란수괴죄로 구속 기소했어. 이후 재판을 거쳐 노 전 대통령은 17년 형이 확정되었고, 2,628억 9,600만원의 추징금이 부과되었어. 2년여간의 수감생활 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지. 이후 오랫동안 추징금 미납 논란에 시달리다가 지난 2013년 9월에 완납했어.
5. ‘보통사람’의 마지막
사면 후 칩거를 이어갔던 노 전 대통령은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왔어. 최근 병세가 악화하여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삶이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어. 유족이 공개한 그의 유언을 요약하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남겼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조문했어. 정부는 많은 의견충돌 끝에 노 전 대통령의 장례를 5일간의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어. 서울광장에 합동분향소가 마련되었지. 30일에 예정된 영결식이 진행된 후에는, 유족들이 희망한 경기 파주시 통일동산 주변으로 장지가 확정될 예정이야. 자유로 건설, 헤이리 예술마을 조성, 평화시 건설구상 등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이 많은 곳인만큼 고인 또한 남북 평화통일의 의지를 담았던 파주 통일동산을 장지로 희망해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