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정치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당위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수많은 대안이 논의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껏 별 효과가 없었던 것 또한 분명하다. 지역 사회에서 유권자를 만나고 민심을 수렴할 줄 아는, 정치의 소명을 지닌 젊은이들이 더 많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려면, 국민의 인식과 정치권의 태도가 함께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청년 정치의 실종. 친숙하다 못해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들어온 이야기다. 그 세부적인 내용도 거의 눈 감고 외울 수 있을 정도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청년을 사실상 배제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젊은이들 스스로가 정치에 뛰어들지 않고 있다. 심지어 투표율도 낮고, 하는 것이라곤 그저 방구석에서 키보드를 치면서 냉소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청년들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자업자득이다.
필자는 소싯적부터 소위 '20대 논객'으로 불리며 청년 담론의 한 당사자로 살아왔다. 이제 어느덧 만으로도 40세를 넘겨버렸으니 더는 스스로를 청년이라 주장하기 곤란한 처지다. '청년 정치의 실종', '정치를 포기한 청년들' 등의 이야기를 접할 때 필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정치를 포기한 청년, 청년을 포기한 정치, 서로가 꼬리를 물고 있는 이 현상의 본질을 짚어내는 의견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 보자. 한국은 정말 청년 정치가 실종된 나라일까? 숫자를 보면 분명히 그렇다. 지난 21대 총선 결과, 전체 의원 중 30세 미만은 2명, 40세 미만은 13명이 당선되었다. 전체 비율로는 4.3%. 이 숫자는 OECD가 아니라 전 세계를 기준으로 놓고 보더라도 턱없이 낮다. 국제의원연맹(IPU) 자료에 따르면, 40세 이하 청년의원 비율이 5%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한민국은 전체 가입국 121개국 중 해당 지표에서 118위를 기록하고 있다.
다른 나라는 이렇지 않다. 노르웨이(34.3%), 스웨덴(31.4%), 덴마크(30.7%), 핀란드(29%) 등, 비례대표제를 택하고 있는 북유럽 국가들은 같은 연령대의 의원 비중이 30%대를 이룬다. 우리가 주로 참고하는 주요국들 역시 프랑스(23.2%), 영국(21.7%), 독일(11.6%), 미국(11.5%), 일본(8.4%)로 우리보다 청년들의 정치 참여 비중이 크다. 특히 '의원직을 세습하는 나라'라며 일부 한국인들이 조롱하는 일본마저 우리보다 더 '젊은 국회'를 가진 나라인 것이다.
정치가 청년을 배제한다고 불평만 할 일은 아닌 듯하다. 청년들 역시 정치를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21대 총선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갓 투표권을 얻은 기쁨에 선거하러 가는 18세(67.5%)를 제외하면, 19세부터 39세까지 40세 미만 청년들의 투표율은 모두 60%에 미치지 못한다. 전체 투표율 66.5%에 비해 한참 낮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25세부터 29세(56.7%), 30세부터 34세(56.5%)의 투표율을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올 정도다. 정치는 청년을 버렸고, 청년도 정치를 버린 것이 숫자로 확인되니 말이다.
이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당장의 선거 제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변경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정치권에서 원하는 정답은 정해져 있다. 비례대표 의석을 늘려서 인위적으로 청년 정치인이 많이 등장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인용한 주요국 중 21.7%의 청년 정치인을 보유한 의원내각제 국가 영국의 경우, 비례대표 의석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단순 다수·소선거구제 국가다. 한국 비례대표의 숫자가 적은 것은 사실이고 그 또한 원인의 일부다. 하지만 청년의 정치 소외라는 현상의 원인을 오직 비례대표 의석수의 부족에서만 찾아서도 곤란하다. 그 원인은 좀 더 깊은 곳에 있다.
잠시 역사를 거슬러 1987년으로 돌아가 보자. 국민들의 염원으로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던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5공 세력과 대립하고 있던 정치 리더는 세 사람이었다. 1929년생 김영삼(당시 59세), 1924년생 김대중(64세), 1926년생 김종필(62세), 이른바 '3김'이었다. 3김은 각각 경상남도, 전라도, 충청도를 본인의 정치적 거점이자 자산으로 삼고 있었다. 해당 지역에서 몰표를 받아낼 수 있는 힘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크면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밑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금까지 한국 정치의 향방을 결정짓고 있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타협점에 도달했다. 사실상 전국 정당이 아니면 창당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당법상 신생 정당의 창당을 매우 어렵게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새로운 정당을 공식적으로 창당하기 위한 조건은 매우 까다롭다. 5개 이상 시도당을 설립해야 하는데, 각 시도당에는 1천 명 이상의 당원이 등록되어 있어야 한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람을 불러 모은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1천 명의 당원이 한 개 지역에 등록되는 것부터가 어렵다. 그런데 그것을 다섯 곳에서 해야 한다? 대선주자급 스타가 있지 않은 한 신당 창당은 거의 불가능하다 보아야 한다.
이렇게 3김은 후발 주자의 참여를 틀어막았다. 지역 맹주로서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입지를 잃지 않기 위해 어지간해서는 지역정당이 나올 수 없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영남은 보수 성향의 정당이, 호남은 진보 성향의 정당이 꽉 잡아버렸다. '텃밭', '집토끼', 등등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한 지역 내에서 여러 정당이 경쟁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지역 정치는 철저히 중앙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본인도 호남 출신인 조귀동 기자는 <전라디언의 굴레>라는 책을 통해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짚고 있다.
"지역 정당은 중앙정치의 예속이라는 지역 정치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앞서 여러 차례 살폈듯이 호남이나 영남에서
각각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절대 우위에 있는 이유는 중앙정치의 권력을 차지하고 그 과실을 배분받기 위한 경쟁 과정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청년 정치와 무슨 상관일까?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가 흔히 청년 정치의 나쁜 모습이라고 여기는 이른바 '여의도 2시 청년'들을 생각해 보자. 특별한 생업도 없이 남들 일하는 낮 시간에 여의도에서 어슬렁거리는 정치 지망생들을 비웃는 표현이다. '여의도 2시 청년'은 대체 왜 발생하는 현상일까? 앞서 말한 대한민국의 정치적 구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청년의 ‘정치 스타트업’ 창업이 아예 불가능한 나라다. 아무리 신선하고 창의적인 정치적 플랜을 갖고 있다 한들, 정치 신입생인 청년이 스스로 창당하여 지역의 유권자를 설득하고 한 표씩 얻어가는 일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다. 갑자기 대선주자급 스타가 되어 판세를 뒤흔들 수 있는 정도가 아닌 다음에야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 속의 청년이 정치에서 꿈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두 거대 정당 중 어딘가의 높은 분의 관심을 받아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혀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여의도 어딘가에서, 동년배의 삶과 한없이 멀어진 채, 남들이 열심히 일하는 시간에 정치 행사를 기웃거리고 얼굴도장을 찍으러 다니는 '여의도 2시 청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 현상은 청년과 정치의 사이가 더 멀어지게 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평범한 청년들로서는 도저히 '여의도 2시 청년'들을 자신들의 대표자로 볼 수 없다. 청년 정치를 하겠다고 나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겠고 내 삶과도 관련이 없어 보인다. 선거에 나오는 쟤들은 다 대충 먹고살 만해서 하는 짓 같다. 나는 그냥 PC방에서 게임이나 하고 해외여행이나 갔다 오는 게 낫다. 이렇게 청년과 정치는 날이 갈수록 서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청년 정치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당위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수많은 대안이 논의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껏 별 효과가 없었던 것 또한 분명하다. 이 문제는 단지 어떤 선거제도 차원의 것도,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들의 불평과 투정이라고 일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청년이 정치를 포기하고, 정치가 청년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 국민이 감격의 직선제 개헌과 형식적 민주화를 이루어내면서 만들어진, 이른바 '87년 체제'가 지니는 본질적 한계가 빚어내고 있는 문제다.
불행하게도 가장 힘이 센 두 정당은 이 구조 속에서 이득을 보고 있다. 세 번째로 많은 의석을 가진 정당은 비례대표만 늘리면 된다는 공염불을 외운다. 일종의 종교적 믿음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은 정도다. 지역 사회에서 유권자를 만나고 민심을 수렴할 줄 아는, 정치의 소명을 지닌 젊은이들이 더 많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려면, 국민의 인식과 정치권의 태도가 함께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청년 정치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당위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수많은 대안이 논의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껏 별 효과가 없었던 것 또한 분명하다. 지역 사회에서 유권자를 만나고 민심을 수렴할 줄 아는, 정치의 소명을 지닌 젊은이들이 더 많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려면, 국민의 인식과 정치권의 태도가 함께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청년 정치의 실종. 친숙하다 못해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들어온 이야기다. 그 세부적인 내용도 거의 눈 감고 외울 수 있을 정도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청년을 사실상 배제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젊은이들 스스로가 정치에 뛰어들지 않고 있다. 심지어 투표율도 낮고, 하는 것이라곤 그저 방구석에서 키보드를 치면서 냉소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청년들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자업자득이다.
필자는 소싯적부터 소위 '20대 논객'으로 불리며 청년 담론의 한 당사자로 살아왔다. 이제 어느덧 만으로도 40세를 넘겨버렸으니 더는 스스로를 청년이라 주장하기 곤란한 처지다. '청년 정치의 실종', '정치를 포기한 청년들' 등의 이야기를 접할 때 필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정치를 포기한 청년, 청년을 포기한 정치, 서로가 꼬리를 물고 있는 이 현상의 본질을 짚어내는 의견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 보자. 한국은 정말 청년 정치가 실종된 나라일까? 숫자를 보면 분명히 그렇다. 지난 21대 총선 결과, 전체 의원 중 30세 미만은 2명, 40세 미만은 13명이 당선되었다. 전체 비율로는 4.3%. 이 숫자는 OECD가 아니라 전 세계를 기준으로 놓고 보더라도 턱없이 낮다. 국제의원연맹(IPU) 자료에 따르면, 40세 이하 청년의원 비율이 5%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한민국은 전체 가입국 121개국 중 해당 지표에서 118위를 기록하고 있다.
다른 나라는 이렇지 않다. 노르웨이(34.3%), 스웨덴(31.4%), 덴마크(30.7%), 핀란드(29%) 등, 비례대표제를 택하고 있는 북유럽 국가들은 같은 연령대의 의원 비중이 30%대를 이룬다. 우리가 주로 참고하는 주요국들 역시 프랑스(23.2%), 영국(21.7%), 독일(11.6%), 미국(11.5%), 일본(8.4%)로 우리보다 청년들의 정치 참여 비중이 크다. 특히 '의원직을 세습하는 나라'라며 일부 한국인들이 조롱하는 일본마저 우리보다 더 '젊은 국회'를 가진 나라인 것이다.
정치가 청년을 배제한다고 불평만 할 일은 아닌 듯하다. 청년들 역시 정치를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21대 총선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갓 투표권을 얻은 기쁨에 선거하러 가는 18세(67.5%)를 제외하면, 19세부터 39세까지 40세 미만 청년들의 투표율은 모두 60%에 미치지 못한다. 전체 투표율 66.5%에 비해 한참 낮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25세부터 29세(56.7%), 30세부터 34세(56.5%)의 투표율을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올 정도다. 정치는 청년을 버렸고, 청년도 정치를 버린 것이 숫자로 확인되니 말이다.
이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당장의 선거 제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변경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정치권에서 원하는 정답은 정해져 있다. 비례대표 의석을 늘려서 인위적으로 청년 정치인이 많이 등장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인용한 주요국 중 21.7%의 청년 정치인을 보유한 의원내각제 국가 영국의 경우, 비례대표 의석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단순 다수·소선거구제 국가다. 한국 비례대표의 숫자가 적은 것은 사실이고 그 또한 원인의 일부다. 하지만 청년의 정치 소외라는 현상의 원인을 오직 비례대표 의석수의 부족에서만 찾아서도 곤란하다. 그 원인은 좀 더 깊은 곳에 있다.
잠시 역사를 거슬러 1987년으로 돌아가 보자. 국민들의 염원으로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던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5공 세력과 대립하고 있던 정치 리더는 세 사람이었다. 1929년생 김영삼(당시 59세), 1924년생 김대중(64세), 1926년생 김종필(62세), 이른바 '3김'이었다. 3김은 각각 경상남도, 전라도, 충청도를 본인의 정치적 거점이자 자산으로 삼고 있었다. 해당 지역에서 몰표를 받아낼 수 있는 힘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크면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밑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금까지 한국 정치의 향방을 결정짓고 있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타협점에 도달했다. 사실상 전국 정당이 아니면 창당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당법상 신생 정당의 창당을 매우 어렵게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새로운 정당을 공식적으로 창당하기 위한 조건은 매우 까다롭다. 5개 이상 시도당을 설립해야 하는데, 각 시도당에는 1천 명 이상의 당원이 등록되어 있어야 한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람을 불러 모은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1천 명의 당원이 한 개 지역에 등록되는 것부터가 어렵다. 그런데 그것을 다섯 곳에서 해야 한다? 대선주자급 스타가 있지 않은 한 신당 창당은 거의 불가능하다 보아야 한다.
이렇게 3김은 후발 주자의 참여를 틀어막았다. 지역 맹주로서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입지를 잃지 않기 위해 어지간해서는 지역정당이 나올 수 없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영남은 보수 성향의 정당이, 호남은 진보 성향의 정당이 꽉 잡아버렸다. '텃밭', '집토끼', 등등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한 지역 내에서 여러 정당이 경쟁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지역 정치는 철저히 중앙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본인도 호남 출신인 조귀동 기자는 <전라디언의 굴레>라는 책을 통해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짚고 있다.
"지역 정당은 중앙정치의 예속이라는 지역 정치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앞서 여러 차례 살폈듯이 호남이나 영남에서
각각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절대 우위에 있는 이유는 중앙정치의 권력을 차지하고 그 과실을 배분받기 위한 경쟁 과정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청년 정치와 무슨 상관일까?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가 흔히 청년 정치의 나쁜 모습이라고 여기는 이른바 '여의도 2시 청년'들을 생각해 보자. 특별한 생업도 없이 남들 일하는 낮 시간에 여의도에서 어슬렁거리는 정치 지망생들을 비웃는 표현이다. '여의도 2시 청년'은 대체 왜 발생하는 현상일까? 앞서 말한 대한민국의 정치적 구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청년의 ‘정치 스타트업’ 창업이 아예 불가능한 나라다. 아무리 신선하고 창의적인 정치적 플랜을 갖고 있다 한들, 정치 신입생인 청년이 스스로 창당하여 지역의 유권자를 설득하고 한 표씩 얻어가는 일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다. 갑자기 대선주자급 스타가 되어 판세를 뒤흔들 수 있는 정도가 아닌 다음에야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 속의 청년이 정치에서 꿈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두 거대 정당 중 어딘가의 높은 분의 관심을 받아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혀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여의도 어딘가에서, 동년배의 삶과 한없이 멀어진 채, 남들이 열심히 일하는 시간에 정치 행사를 기웃거리고 얼굴도장을 찍으러 다니는 '여의도 2시 청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 현상은 청년과 정치의 사이가 더 멀어지게 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평범한 청년들로서는 도저히 '여의도 2시 청년'들을 자신들의 대표자로 볼 수 없다. 청년 정치를 하겠다고 나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겠고 내 삶과도 관련이 없어 보인다. 선거에 나오는 쟤들은 다 대충 먹고살 만해서 하는 짓 같다. 나는 그냥 PC방에서 게임이나 하고 해외여행이나 갔다 오는 게 낫다. 이렇게 청년과 정치는 날이 갈수록 서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청년 정치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당위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수많은 대안이 논의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껏 별 효과가 없었던 것 또한 분명하다. 이 문제는 단지 어떤 선거제도 차원의 것도,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들의 불평과 투정이라고 일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청년이 정치를 포기하고, 정치가 청년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 국민이 감격의 직선제 개헌과 형식적 민주화를 이루어내면서 만들어진, 이른바 '87년 체제'가 지니는 본질적 한계가 빚어내고 있는 문제다.
불행하게도 가장 힘이 센 두 정당은 이 구조 속에서 이득을 보고 있다. 세 번째로 많은 의석을 가진 정당은 비례대표만 늘리면 된다는 공염불을 외운다. 일종의 종교적 믿음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은 정도다. 지역 사회에서 유권자를 만나고 민심을 수렴할 줄 아는, 정치의 소명을 지닌 젊은이들이 더 많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려면, 국민의 인식과 정치권의 태도가 함께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